서예가 율산(栗山) 리홍재(李洪宰) 작가. 그의 나이는 이제 진갑(進甲)에 이르렀다. 20대 초반부터 붓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니 무려 40여 년 동안 붓 한 자루에 모든 것을 걸고 외길을 걸어왔다. 율산 선생(이하 율산으로 호칭)처럼 다재다능하고 열정적인 작가는 그리 흔하지 않다. 작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온 족적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경북 김천 감문면에서 출생한 율산은 한학을 하는 조부와 농부인 아버지 슬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림 잘 그리는 누나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미술반에 들어갔고 5학년 때부터 습자시간에 글씨를 잘 써서 담당교사인 김인규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 서예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호기심 많은 그는 학과 공부보다 글씨쓰기가 좋아 한자사전에 있는 글자들을 종이든 땅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맘대로 그리는 게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중고등학교에서도 미술반에서 활동했지만 한자를 더 좋아해서 한자사전을 가지고 놀기 일쑤였다. 공부를 위해 대구로 온 뒤 1976년 약관의 나이에 대구시청 앞에 있었던 죽헌 현해봉 선생이 지도하는 대한서예원을 보면서 서예에 대한 설레임이 일어났다. 도의원을 지낸 죽헌 선생의 서실에 입문하면서 본격적인 서예인생이 시작된다. 3년 정도 서실에서 공부와 숙식을 하면서 서예에 몰입한다. 타고난 천질에 노력이 더해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운필에 능숙함이 더해진다. 영(永)자를 달포 가량 익힌 뒤 당나라 해서(楷書)의 대표격인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과 왕희지의 <난정서>, <집자성교서> 등 행서(行書)와 예서(隸書)인 <조전비>, 전서(篆書)인 오창석의 <석고문>, 초서(草書)인 <서보> 등 한문서예 오체(五體)를 닥치는 대로 임서했다. 물론 스승이 지도하는 진도와는 상관없이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했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이 스승이 부재할 때 젊은 청년서가에게 지도를 청할 정도로 학습의 양적인 면에서도 열배 이상 차이가 났고 필재도 뛰어났다. 그런 제자를 보면서 스승은 서예가로서 대성할 동량(棟梁)임을 간파하고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그러나 노력하는 만큼 쉽사리 길이 보이지 않자 청년서가는 방황에 빠진다. 명산대천을 찾아 마음을 추스르기도 하고, 취직을 하면서 현실도피도 해보지만 예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붓을 잡기 시작하면서 이틀에 한 번씩 필방에 나가 화선지 100장을 가져가자 필방주인이 눈여겨보았다. 어느 날 필방을 방문하자 대구에서 종이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청년서가가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고 여러 사람들이 에워싸고 경서에 나오는 글귀를 불러준다. 주변에서 말하는 그대로 즉석에서 그 동안 공부한 것에 자신의 필의(筆意)를 보태어 휘호하자 탄성을 자아낸다. 그 모습을 본 필방의 김진구 사장이 서실을 같이 하자고 제의한다. 덜컥 겁도 나고 공부에 대한 자신도 없어 사양했지만 대구 중심가 덕산동 중앙파출소 뒤에 이미 서실을 차려놓고 원장으로 초빙한다. 그리하여 1979년 7월 율산서도원이 탄생한다. 스물두 살에 서실 원장이 된 것이다. 갑자기 서실 원장이 되자 교학상장(敎學相長;가르치고 배우면서 함께 성장함)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에 열중한다. 공부의 결과로 1980년 5월 스물네 살에 70여 점의 작품을 준비해 동아백화점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 된다. 청년서가의 혈기방강한 작품 다수가 주인을 만날 정도로 호평을 얻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가능하다는 용기를 얻어 82년과 84년 중앙미술관의 개인전으로 연결되었고, 86년 부산의 불교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초대전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공부가 부족한 상황에서 설익은 작품을 남발한다는 주위의 충고를 겸허히 수용하여 내공쌓기에 몰두한다. 전국의 유명작가를 내방하여 그들의 운필과 작품을 살펴보았고, 80년부터 시작된 서실전에 최선을 다해 열아홉 번의 서실전을 열 정도로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82년 미술대전에 첫 입선을 하였고, 89년 청년작가전을 통해 중앙서예계에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96년 불혹의 나이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로 등단한다. 그 뒤 97년 ‘자괴전’이란 주제로 대림당화랑에서 소품전을 펼쳤고, 98, 99년 대형 붓으로 퍼포먼스를 펼치는 광경이 ‘전국은 지금’, ‘6시 내고향’ 등 TV에 소개되면서 퍼포먼스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2002년 ‘밀리오레특별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시장에서 본격적인 서예퍼포먼스를 선보였고, 2008년 서울미술관에서 64폭 병풍 등 엄청난 숫자의 작품으로 관심을 받은 미친(美親)서예전, 2010년과 2011년 중국 중국 항주의 신비전과 상해에서 1천평의 전시장에 펼친 대형전시로 호평을 받으면서 서예가로서 독자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력 40년을 넘기면서 그 동안 발표했던 열 번의 개인전에서 가려낸 주옥같은 작품과 신작을 모아 스스로 명품이라 규정하면서 율산 서예 인생길 60년 서예 명품전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