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또 새들의 자유분방한 지저귐을 벗 삼아 대자연의 맑고 고운 환경 속에서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하나의 동경이고 이상일 뿐이다. 사람이 사는 일은 그토록 간단치가 않다. 단순하게 입고 먹고 자는 일 뿐이 아니다. 개성과 감성이 다르기에 입는 것도 차이나고, 먹는 것도 차이나고, 또 자는 곳마저 차이나게 마련이다. 취향 따라, 입맛 따라, 위상 따라 각자가 틀린다. 사철 입는 옷도 틀리고, 하루 세끼씩 먹는 음식도 다르고, 문패붙이고 사는 집도 부자와 가난으로 나뉜다. 항상 남보다 예쁜 옷도 입어야하고, 끼니마다 맛있는 음식도 먹어야 한다. 또 남보다 큰집,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고 싶고, 남 앞에 호기부리며 돈도 마음대로 써보고 싶다. 너나 없는 욕심이다. 무량한 욕심 때문에 번민, 고뇌, 경쟁, 갈등, 불신, 그리고 모함, 흉계, 결국은 끔찍한 살인, 범죄까지도 생긴다. 불가에서는 마음을 비우라고 가르친다. 악의 근원인 욕심을 버리라는 뜻이다. 때문에 淸靖無慾(청정무욕)은 승가의 최대 수행덕목이다. 생각 속에 잠재된 욕심을 버릴 때 정결한 생각과, 맑은 정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기로도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순간의 결심은 인생의 승패를 가른다. 승(僧)을 스스로 중(中)이라 부르는 것도 선악을 깨닫고, 심판하는 중심의 사명자라는 뜻이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라고 했다. 빈손으로 태어나 죽을때도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다. 욕심을 버리라는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태어날 때 마음은 누구나 하얀 종이와 같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종이의 가치는 쓰임에 따라 달라진다. 쓰는 사람의 마음(결심)에 달렸다. 독자들을 감동 시킬 몇 줄의 글로 대대손손 가보가 될 수도 있고, 잘못 쓰여지면 순간에 구겨지고 찢기어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우리들 삶의 운명도 비슷하다. 소유와 무소유의 진리, 그 또한 어찌 다르랴. 문제는 욕심이다. 때문에 처절한 수행 없이는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이 바로 淸靖無慾(청정무욕)의 경지다. 웃고 울기를 거듭하며 희로애락에 몸이 밴 범부의 일상이란 비우기가 채우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는 욕심으로, 못가진 자는 가진 자에 대한 상대적 배신감 때문이다. 허기야 욕심 없는 삶은 없다.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욕심은 버릴 수 없다. 완전한 무소유는 없다. 생명을 지키는 것, 수양을 쌓는 것,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갖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 소유가 아니던가. 지나침이 문제다. 소유의 지나침은 욕심이고, 무소유의 지나침은 죽음이다. 비우라 하면서도 더욱 채우고, 버리라 하면서도 더욱 옥죄는 집착이 바로 욕심이다. 누구나 삶의 구비마다 자글대는 정신적 갈등과 물질적 고통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왜 훌훌 털어버리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청정무욕의 길은 말로는 쉬워도 실천으로 어렵다. 더구나 이기주의가 우선인 오늘의 세태현실에선 더욱 어렵다. 끈적대는 미련 한 가닥이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진다. 때문에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하며 설산고행으로 찾은 부처님의 길, 만백성의 죄 값을 대신해서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자청한 예수의 길은, 淸靖無慾(청정무욕)의 등불이 아닐 수 없다. 영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심에 세월은 아랑곳없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하얀 구름이 바쁘게 스친다. 산사의 문장가 법정스님은 "인생은 구름 한 점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생겨나고 없어지는 세상의 이치가 어찌 사람뿐일까. 그토록 가지려고만 발버둥치는 욕심도 죽을 때는 내 것이 아니다. 淸靖無慾(청정무욕)···, 소유의 다른 이름 무소유를 생각하게 한다.